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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확증 편향, 불행한 고집
    Elohist 2018. 5. 4. 00:42


    확증편향, 불행한 고집





    #1

    2014년 1월, 세계 유수의 언론사들은 일본군 장교였던 한 노인의 사망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90대 노인의 부고가 각국에서 화제가 된 것은 그의 독특한 이력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그는 1945년 종전 후에도 수십 년 동안 투항을 거부하고 필리핀에서 '나홀로 전쟁'을 이어간 것으로 유명하다.


    때는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1944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250명의 병사를 이끌고 필리핀 라방섬에서 임무 수행 중이던 H소위는 비행장 활주로를 파괴하여 미군의 공격을 지연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듬해 봄, 그의 소속 부대는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으나 미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궤멸되다시피 했고 패잔병들은 산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몇 달 뒤 전쟁이 끝나고, 미군과 필리핀 정부가 뿌린 전단지를 통해 종전 소식을 접한 대다수의 일본 병사들은 산에서 내려와 투항했다. 반면 H소위와 몇몇 동료는 미국과 필리핀 측의 전단지 살포를 심리전의 일환으로 여기고 정글을 떠나지 않았다. 믿을 만한 사람들로부터 종전 소식을 듣고 난 후에도 그는 게릴라전을 계속 벌였다.


    "H소위! 전쟁은 끝났으니 숲에서 나오거라.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자!"


    옛 전우들이 루방섬을 찾아와 해를 넘기면서까지 대치 중인 그에게 종전 사실을 알렸으나 H소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주민 마을을 습격해 약탈하고 불을 지르며 무고한 인명을 살상했다. 스스로는 전시 상황에 적절한 행동이자 임무 수행의 방편으로 여겼을지 몰라도 종전 후 겨우 자유와 평화를 되찾은 피해자들에게 H소위의 행동은 무자비한 범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난처해진 일본 정부가 그의 가족까지 필리핀으로 보내 설득하게 했지만 H소위는 절대 고집을 꺾지 않았고, 몇 안 되는 동료들이 숨을 거둔 뒤에도 끝까지 자신만의 전쟁을 붙들고 늘어졌다.


    30년 가까이 이어진 그의 만행은 일본의 한 대학교수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H소위의 사연을 접하고 흥미를 느낀 N교수가 루방섬으로 건너가 차근차근 정황을 설명하자 협상의 여지가 생긴 것. 긴 대화 끝에 H소위는 마침내 투항 의사를 밝혔다. 그러고 나서도 그는 자신의 직속상관이 와서 항복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근무지를 이탈하지 않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N교수는 수소문 끝에 전시 중 직속상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Y씨를 찾아냈다. 군복을 벗은 지 한참 지난 Y씨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필리핀에 건너가 투항 명령서를 건넨 후에야 비로소 H소위는 총을 내려놨다.


    22세에 조국을 떠났던 청년 H소위는 52세의 중년이 되어 본국으로 무사 귀환했다. 하지만 29년간 지역 순찰대와 민간인 등 3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100여 명에게 부상을 입힌 과오는 돌이킬 수 없었다. 그가 조국의 패전을 인정하지 않으려 눈과 귀를 가린 채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이어간 혼자만의 기나긴 전쟁은, 자신의 삶을 피와 범죄로 물들였을 뿐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2

    1888년 창립해 승승장구하던 필름 업체 K사. 유리판과 화학약품을 이용해 번거로운 방법으로 사진을 찍던 시절, K사가 개발한 롤필름은 편리하면서도 좋은 품질로 한때 90퍼센트까지 시장 점유율을 달성했다. 1969년 최초로 달을 탐사한 닐 암스트롱의 손에는 K사의 필름이 들려 있었다.


    잘 나가던 K사가 위기를 맞은 것은 2000년대 초. 주식 시가총액이 75퍼센트나 줄고 직원을 3분의 2나 감축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던 K사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지난 한 세기 동안 필름은 기억할 만한 순간을 남기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장점만큼 단점도 명확하다. 카메라를 가지고 있어도 필름을 구입하고 인화하려면 추가 비용이 든다. 졸업식을 앞두고 필름을 구입한 소비자는 졸업식에서 사진을 찍고 필름을 사진관에 맡겼다가 며칠 뒤에야 인화료를 지불하고 결과물을 확인하는 식이다.


    ‘만약 필름을 안 넣어도 되는 카메라가 있다면? 굳이 인화하지 않고도 사진을 볼 수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봤을 법한 카메라를 1981년 일본의 S사가 업계 최초로 출시한다. 디지털카메라였다. 이미지 센서에 영상을 투사해 촬영하는 디지털카메라는, 플로피 디스켓 등 디지털 매체에 사진을 저장해 컴퓨터로 볼 수 있었다. 한 마디로 필름이 필요 없었다.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은 필름 사업의 쇠퇴를 의미했고, 위기를 감지한 K사의 협력 업체들은 필름의 미래를 불안해했다. 이에 K사는 시장 전망을 파악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소지바들은 디지털카메라의 인화물을 사진 과학에 기초한 인화물(필름 사진)의 대체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인화물을 직접 다루고 현상하고 유동시키려는 소비자의 욕구는 디지털 기기로 대체할 수 없다.

    *디지털 촬영 시스템은 호환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아마추어 사진사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카메라와 TV를 통해 사진을 보는 디지털 시스템은 소비자의 사랑을 받을 만큼 가격이 낮아지지 않을 것이다.


    종합해보면, 디지털카메라가 위협적이기는 하나 필름 사업은 건재할 거라는 예측이다. K사의 자신감 충만한 예측은 일부분 맞아 떨어졌다. 초기에는 보완할 점이 많고 가격이 비쌌던 탓에 십수 년이 지나서야 디지털카메라의 보급이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필름 값 걱정 없이 마음껏 셔터를 누르고 액정 화면과 컴퓨터로 즉시 사진을 볼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는 폭발적 관심 속에 빠르게 발전했다. 1990년대 중반 휴대폰 카메라까지 등장하자 필름 수요는 급격히 줄었고 K사의 매출 또한 곤두박질쳤다.


    애써 현실을 외면하던 K사는 디지털카메라에 필요도 없는 필름을 집어넣은 엉뚱한 제품을 선보이는 데까지 이르렀다. 각계에서 “K사의 최대 수익원은 디지털 경쟁 속에 사라져버릴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사업 방향을 틀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필름 사업을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고 경고하는데도 여전히 필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었다. 이미 디지털카메라의 편리함을 맛본소비자들의 반응은 예상대로 싸늘했고 제품 개발비 5억 달러는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그제야 필름을 빼고 완전한 디지털 방식의 카메라를 내놓았지만 가격도, 기술도 경쟁사들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사실 K사는 누구보다 먼저 디지털카메라 시장을 선점한 기회가 있었다. 1970년대 중반, S사가 디지털카메라를 출시하기 몇 년 전 이미 디지털카메라의 핵심 부품인 센서를 최초로 생산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름의 계속된 성공으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던 K사에 디지털 기술은 기존 사업을 방해할 장애물에 불과했다. 한 임원이 센서 개발자에게 “그것 참 귀엽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는 일화는 당시 K사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제 아무리 디지털 기술이 발전한다 해도 소비자들의 필름 사랑은 변치 않을 것이며 카메라 시장은 언제까지고 자신들을 중심으로 돌아갈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K사의 눈과 귀를 가리고 말았다. 우려가 현실로 바뀌고 있는데도 상황을 직시하지 못한 채 주위의 조언을 새겨듣지 않은 K사의 안일한 대처는 결국 2012년 접정 파산 보호를 신청하는 뼈아픈 결과로 나타났다.




    #3

    2천 년 전, 이스라엘 베들레헴 땅에 나신 예수 그리스도. 30세에 침례를 받으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신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고, 소경의 눈을 밝히고, 벙어리의 입을 열어주고, 새 언약의 유월절로 인류에게 죄 사함의 길을 열어주셨다. 모든 것이 성경 예언의 성취였다(미 5장 2절, 사 35장 3~10절, 사 25장 6~9절).


    그러나 당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구원자를 영접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배척하고 박해했다. 나름대로 명분과 근거는 있었다.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그리스도일 리 없다”, “사람이 되어 어찌 자칭 하나님이라 하느냐”,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사단을 힘입었기 때문이다”(막 6장 3절, 요 10장 31~33절, 마 12장 23~24절)… 유약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의 말에 열렬히 동조했다.


    스스로 쌓아 올린 편견과 고정관념을 마치 진리인 양 여기던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들으려 하지 않았고, 눈앞에 나타난 구언자의 뺨을 때리고 침을 뱉으며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는 불상사까지 저질렀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셨을 때 역시 돈을 써서 군병들의 입을 막으며 진실을 감추는 데 급급했다(마 28장 11~15절).


    자신들의 믿음에 반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눈과 귀를 막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상황을 해석하려 들었던 유대인들의 행위는 한마디로 ‘확증 편향’이었다. 확증 편향이란 선입관을 뒷받침하는 정보와 자신에게 유리한 지식만 선택적으로 수집해 판단하는 태도를 말한다. 쉽게 말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성향이다.


    확증 편향은 흔히 자기 주장만 밀어붙이려 하는 고집으로 나타난다. 자기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단정 지어놓고, 믿을 만한 정보가 있어도 아예 소통을 거부하는 것이다. 기업인 워런 버핏은 “사람들이 가장 잘하는 것은 기존의 견해가 온전히 유지되도록 새로운 정보를 걸러내는 일이다”라며 이러한 성향을 꼬집었다.


    문제는 맹목적인 고집이 자신뿐 아니라 타인과 조직까지 위험에 빠트리기도 한다는 데 있다. 종전 소식을 듣고도 혼자만의 전쟁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H소위, 달라진 현실을 인정하지 않다가 결국 위기에 내몰린 K사처럼.


    확증 편향에 빠지지 않으려면, 편견과 고정관념에 매몰되어 진실을 왜곡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겸손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진실이 무엇인지 백지상태에서 확인하겠다는 열린 사고방식을 갖출 때, 진실이 어떤 모양과 방향으로 나타나든 올바로 마주하며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 반대로 스스로 세워놓은 견해나 주장을 증명하겠다는 식으로 지식과 정보를 살피려 들면 시각은 비뚤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더더욱.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장 9절)


    하나님의 길은 인생의 길보다 높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방법이 내 생각과 다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생각의 틀에 욱여넣으려 한다면 2천 년 전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근거한 생각이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아집일 뿐이므로.


    참된 신앙은 구원자를 증거하는 책,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확증 편향의 함정을 뛰어넘어 편견과 고정관념의 벽을 허물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볼 때, 성경이 증거하는 이 시대의 구원자를 영접할 수 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장 17절)




    [참고]

    최창원, 『데이터 인사이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춘카 무이 〮 폴 캐롤, 『똑똑한 기업을 한 순간에 무너뜨린 위험한 전략』, 이진원 역, 흐름출판, 2009

    김종현, 「섬 안의 섬」, 투데이신문, 2017. 9. 27.


    @ 내용 출처: 하나님의교회 엘로히스트

    @ 이미지 출처: 네이버, 픽사베이, 패스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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